ٿ
 
 
 






 
  [2020년] 꿈밭에서 꽃들이
      작가명 : 김현주
      전시일정 : 2020.8.11 - 8.21


태어나보니 이미 견고하게 존재하고 있었던 세계의 건설엔 그다지 기여한 바가 없기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내가 말할 수 있는 오직 나만의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꿈의 세계일 것이라 생각했다. 나의
수면 활동. 한 개인의 일생 중 1/3의 시간. 그러니까 눈을 감고 있는 상태에서 경험하는 꿈은 개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꿈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장소 사람들은 내 뇌가 창조한 오직 나만의 실제 세계일 것이다. 어찌 보면 터무니없는, 이 만져지지 않는 실재계, 억압 없는 사적 공간에서 나는 여과되지 않는 감정들을 분출해낸다. 나는
현실보다 더 실제 같은 느낌을 주는 꿈에 대하여, 그 잡힐 듯한 리얼리티를 캔버스에 표현하고자 한다.


작업을 시작할 때는 선명한 아이디어도, 밑그림도, 구체적인 계획도 없다. 오직 작은 사진 또는 드로잉들의 모음만 존재한다. 이미지를 눈으로 분해한 후 색깔을 정하고 팔레트에 물감을 섞은 뒤 색에 색을 더하고 혼란스럽고 탁한 표면을
윤곽 라인을 사용하여 인물과 배경을 분리하고 또다시 색을 입힌다. 그 결과 라인에 라인이 더해지고, 색 위에 색이 덧대지고, 질감에 질감이 더해진 그림들을 생성한다.


왜 그림인가? 무엇을 그리는가? 왜 꿈을 그리고 싶은가? 어떻게 꿈을 평면 이미지로 표현할 것인가? 등의 무수한 질문에 그림을 그리는 자 오직 그림만으로 해답을 도출하리라 믿었다. 그리하여 최근 몇 년간 스튜디오에 달라붙어 수백점의 그림들을 생산해 냈다. 예를
들면, 현대 잠재의식의 창고라 불리는 구글의 이미지 서치를 통해 내 꿈과 비슷한 사진들을 찾아내 그것들을
재창조한 그림 (public vs private).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악몽을 말 그대로 되풀이해서 50점에 가까운, 보기에는 같아 보이는, 그림에서 그림을 복제하는 그림 (repetition compulsion). 꿈과
비슷한 배경을 세팅한 뒤 모델을 이용해 촬영한 사진들을 기반으로 하는 그림 (recreated reality).
이미지 소스들의 콜라지를 통해 만들어진 그림 (image manipulation). 죽음의
과정을 주제로 하여 죽어가는 꽃들은 추상화 형식으로 표현한 그림 등 (abstract expression
mark making).
그림으로 전환되는 소스를 찾는 과정에 집중해 왔으나 마지막 과정은 항상 그렇듯 의심이다. 내가 만들어 낸 것은 그림인가? 꿈인가? 꿈을 닮은 그림인가? 그림을 닮은 꿈인가? 이 수많은 질문에 오답 노트들을 만들어 왔으나 이제는 묻기가 두렵다.
그림을 그리는가? 이제는 묻지 않는다. 아무것도 나는 버릴
수가 없다.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리고 싶다. 이 삶에서 경험하는
달콤한 징벌인 듯, 꿈속에서 꾸는 이중의 꿈처럼 그리는 그림 속에서 계속 그릴 것이라 이야기한다.


그림을 그리는 육체적 행위 속에서 그림이 나를 지배하기를 원한다. 색을 섞는 행위에 온 마음을 다하고 그림이 만들어지는 물질적 과정을 경배하는 나는 스튜디오에서 일상을 바치고
노동을 바친다. 꿈이라는 것은 보이지만 눈을 뜨고 경험하는 시각 활동이 수반되지 않으며, 살아있지만 깨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내가
그림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요소들도 이와 상통한다. 보고 있지만 보는 게 아니라 시각을 넘어선 감각본능을
통해 느껴지는 것, 그리고 비록 찰나일지라도 깨어있다는 각성과 동시에 깨어있는 상태를 잊게 만드는 것. 항상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들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꿈을 꾸는
행위는 일상을 통해 생성과 사라짐을 반복한다. 분명 존재하는 세계이지만 물질적 기반을 중시하는 사회
속에서 이야기되는 우선순위에선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사라져 버리는 것들, 변형되고 망각되는 기억들,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들, 그리고 반복되는 행위에 대한 관심을 나누고 싶다. 나만의 시각 언어를
너의 것으로 그리고 우리의 것으로 확장하는 인칭 변화에 관심이 있다. 회화의 변형작업을 통해 시각적
상징물인 캔버스 위에 물감으로 그려진 그림을 만들어 내며 이 상징을 통해서 타인이 언젠가 경험했고 앞으로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는 낯선 시각적 구조를
선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