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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Amuseument’ [Amusement + museum]
      작가명 : 나광호
      전시일정 : 2018.6.11 - 6.22


놀이와 개념 사이





 


  이추영,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나광호는 자신의 작품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Infandult(Infant+Adult)Amuseument (Amusement+Museum)라는 합성어를 만들었다. ‘아이와 성인’, ‘놀이와 미술관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대척점에 위치하는 단어들이다. , ‘미성숙한 존재의 원초적인 놀이(재미)로써의 결과물과 고도의 정신성과 숙련된 기술을 지닌 프로페셔널 작가와 그 창작물을 소장하는 미술관사이에는 꽤나 큰 간극이 있다. 작가는 단어와 단어사이에 존재하는 의미의 간극을 싹둑 잘라내어 하나의 몸통으로 만들었다. 저울의 양 끝단 위에서 다름차이의 가늠자로 존재했던 개념들이 나광호의 작품 속에서 낯섦낯익음을 간직한 채 새로운 형태로 공존하게 된 것이다.


나광호가 학생들의 작품에서 재인식한 흥미 요소는 거리낌 없는 원초적인 창작의 자발성, 형식의 자유로움, 놀이로서의 즐거움 등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예술 창작의 시원(始原)이 되는 이러한 본능적 소양은 현대의 복잡한 시스템 속에서 예술이라는 전문적인 영역에 이르기 위한 체계적인(?) 교육과 지난한 훈련의 과정에서 서서히 소멸되게 마련이다. 현대의 예술은 원초적인 본능의 발현과 즐거움이라는 순수한 의미를 뛰어 넘어 개념적이고 논리적이며, 치밀하게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한 특수하고 전문적인 영역(대규모의 자본이 바탕이 된 시스템 속에서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는)이 되었다. 나광호의 작품에 대한 주변의 섣부른 오해나 비아냥거림은 어쩌면, 누구나 편입하고 싶어 하는 공고한 시스템의 철옹성에 낙서하는 듯한 그의 무모함과 순박함이 야기하는 예상 가능한 반응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술의 원초적 행위의 자유로움과 재미의 가치를 다시금 들춰내고, 환기시키는 나광호의 작업은 복잡하게 다층화 된 개념과 전략적 논리의 거미줄에 꽉 붙들린 날 것의 감각을 다시금 풀어놓는다는 점에서 충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광호의 작업은 크게, 화면 전면을 활용한 추상적 패턴과 기호가 돋보이는 <채움> 연작(2005~2008), 드로잉의 부분을 확대, 중첩시킨 형태의 키네틱 조각과 대형 벽화로 확장된 Cooked and Raw 연작(2008~2012), 그리고 미술사의 명작을 모방한 드로잉을 캔버스로 옮겨 채색한 회화 연작(2012~2017)으로 구분 할 수 있다. 초기부터 현재까지 외형이나 형식상의 다양한 변화를 거치고 있는 나광호의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형식과 틀을 벗어난 표현 즉, 점찍기, 선긋기, 관찰하고 모방하기, 채색하기 등 원초적이며, 본능적인 표현이 보여주는 무형식의 자유로움이다.


사실, 이러한 원초적인 본능과 독창적인 표현에 대한 관심은 20세기 중반 유럽의 미술사에서 선례를 찾을 수 있다. 어린아이와 정신병자, 아마추어 작가들의 무의식적이며 자발적인 행위에 주목했던 아르 브뤼(Art Brut)는 자유로운 선과 형태, 색채의 즉발성 등에서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아르 브뤼의 창시자인 장 뒤뷔페(Jean Dubuffet, 1901~1985)는 이들의 본능적인 드로잉이 보여주는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특성과 표현양식을 자신의 독자적인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나광호의 작업은 이렇듯 공식적이며, 역사적인 미술사의 사례와 수많은 예술가들이 시도했던 창조적인 모방의 행위를 근거하고 있다. 결국 나광호 작업의 성패는 이러한 역사적인 레퍼런스가 현재의 이 시점에서 왜 재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인지? 어떻게 새로운 방식(형식)으로 재창조 할 수 있을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나광호의 작품은 친숙하고도 낯선 이중의 감정을 유발한다. 아이들의 그림을 대할 때 느끼는 편안함과 예술가의 창작품을 대할 때의 진지함 사이의 혼란이 유발되기 때문이다. 나광호의 근작들은 마네(Edouard Manet 1832~1883), 반 고흐(Van Gogh 1853~1890), 루시앙 프로이드(Lucian Freud 1922~2011), 앤드루 와이어스(Andrew Wyeth 1917 ~2009) 등 서양 미술 대가들의 전설적인 작품을 모방한 것이다. 놀랍게도 이 작품들은 모방의 과정에서 거쳤을 수많은 변형과 왜곡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지닌 고유의 형태와 색채의 아우라를 결코 잃지 않는다. 동서양 미술사에서도 대가들의 작품은 후대 예술가들에게 존경과 모방의 대상임 동시에 예술가의 길에 가로놓인 거대한 벽처럼 치열한 극복의 대상이기도 하다. 사실, 나광호의 작업은 명작을 모방하고 이를 뛰어넘는 새로운 표현을 창조하려는 전통적 방식의 시도라기보다는 예술의 사회적 인식 즉, 예술의 위계상 양 극단(고급, 저급, 상위, 하위 등)에 존재하는 행위들을 끌어당겨서 경계를 없애고 뒤섞어 놓았을 때, 드러나는 낯섦의 순간을 관객들에게 던져놓은 개념적 행위에 가깝다.


나광호의 작품 속엔 대가의 명작과 이를 모방한 학생들의 드로잉 그리고 캔버스에 옮긴 후 완성시킨 작가 등 3자의 존재가 숨겨져 있다. 하지만 외형적으로는 자유 드로잉의 형태적 특성과 소멸되지 않는 명작의 아우라가 전면에 드러나고 이를 총괄(?)한 작가의 존재감은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원초적 드로잉과 명작의 아우라를 결합시킨 개념의 성공적인 조합에도 불구하고 결과물로서의 회화에서 드러나는 창작자 나광호만의 그 무엇(?)을 감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필자는 나광호의 전작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그의 작업 중 Cooked and Raw 연작은 아이들의 낙서의 부분을 추상적인 패턴으로 재배열한 작업으로 작은 액자부터 대형 키네틱 조각, 공장 건물의 벽화 등 공공미술 작업으로 확장되었다. 이 작업에서 작가가 이용한 원재료의 의미는 추상적 패턴 속에 숨겨져 있다. 때문에 관객들은 온전히 작가의 창작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반면에 명작의 모방 작업은 원본의 존재와 이를 따라 그린 아이들, 그리고 채색하여 완성한 작가의 역할과 제작 층위가 명확히 드러난다.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뚜렷한 인상(왜곡된 드로잉의 파격과 명작의 아우라)은 아이러니 하게도 작가의 존재를 화면 속에서 질식시켜 버린다.


나광호의 근작은 현대의 예술이 고도의 정신성과 난해한 개념으로 중무장하고 애써 무시했던, 원초적 행위, 본능적인 즐거움, 창조적인 표현 행위들이 예술의 촉발 인자였음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결과적으로 그의 의도는 명쾌하고 쉽게 인식된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반면, 작가로서의 존재감을 좀처럼 드러내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예술의 직관성과 순수성, 자유로움, 자발적 놀이였던 예술의 근원을 드러내고 상위, 하위, 예술과 장난, 중심과 주변의 경계를 뒤섞어 개념의 틀을 확장시키려는 행위의 씨앗은 싹이 트고, 적당한 크기로 자라났다. 이젠 탐스러운 열매로 관객을 유혹해야한다. 예술가는 과정보다 결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